[신간 베껴읽기] '스필버그의 말' 스티븐 스필버그 외
스필버그 감독은 영화에 상상력과 휴머니즘을 녹여낸 거장이다. 그의 과거 주요 인터뷰들을 모아 편집한 책이다. 최근 것이 없어 아쉽지만 이것만으로도 그와 그의 영화에 관한 일관된 열정과 가치관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상업성과 예술성이 상반되는 영화산업에서 스필버그는 둘을 조합해낸 거장임을 스스로 입증했다. 그는 책 출간 당시 역대 최고 흥행 영화 10편 중 4편(조스, 레이더스, 인디아나존스, 이티) 감독이다. 제작에 참여한 영화까지 포함하면 톱 20편 가운데 7편이 그의 영화였다. 그는 미래 영화의 모습도 일찍이 예측했다. 2018년 한 인터뷰에서 “미래에는 VR이 ‘슈퍼 마약’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아버지가 물려준 영화지향적 환경 - 스필버그의 부모는 그가 열 살이 될 때까지 집에서 TV를 보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그의 관심을 처음 만들어준 것은 가족이었다. 아버지는 가족 여행 때마다 카메라를 가져와 홈 비디오를 찍었고 일주일 후에는 온 가족이 둘러 앉아 함께 보았다고 한다. 부모가 많은 영화를 보여 준 덕에 영화에 더해 적지 않은 정보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열다섯에 아버지의 8mm 카메라로 ‘캐니언영화제’라는 아마추어 영화제에 참가해 1등을 차지했고 16mm 카메라를 상품으로 받아 본격적인 촬영 경험을 쌓게 된다. 열 여섯에는 <불빛>이라는 2시간 30분 길이의 야심찬 SF 영화를 만든다.
* 유니버설에 몰래 들어가 영화를 배우다 - 영화에 미래를 걸겠다고 다짐한 어린 스필버그는 자기 생애에 딱 한 번이었다는 ‘사기’를 치게 된다. 8mm 홈 비디오를 열심히 찍어 왔던 이 고등학생은 1967년에 허락 없이 몰래 캘리포니아의 유니버설 스튜디오 부지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3개월 동안 매일 이곳을 드나들며 다른 감독들이 TV 방송을 만드는 것을 보며 지냈다. 정장 차림에 서류 가방을 들고 들어가는 그를 누구도 저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들킬 것 같으면 자신을 애리조나에서 온 영화감독이라고 속여 모면했다고 한다.
* 21세에 첫 영화를 찍다 - 그의 첫 작품은 TV물 <심야의 화랑(Night Gallery)다. 조앤 크로퍼드, 배리 설리번이 출연한 3부작이었다. 자신의 말로는 “프로로 만든 첫 작품”이다. 그 때 그의 나이는 스물 하나였다. 이후 TV 드라마 <대결>의 극장판이 유럽에서 큰 성공을 거두면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하지만 스필버그는 당시 극장 영화로 직행하길 원치 않았다고 한다. “별로인 TV영화 다섯 편을 찍을 수는 있어도 별로인 극장 영화 다섯 편을 찍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란다. 그만큼 극장 영화 제작에 신중을 기했다. 그는 평소에 첫 극장 영화는 자신의 이야기로 만들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렇게 나온 작품이 <슈가랜드 특급>이었다. 천재 작가 핼 바우드와 매슈 로빈스의 멋진 만화적 상상력에 근거해 매우 상세한 마스터 시나리오를 토대로 계획한 야심작이었다. 하지만 통렬하게 실패한다. 유사한 주제의 영화 두 편을 포함해 <스팅>, <액소시스트>, <빠삐용> 같은 흥행작들이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탓이다. 배급을 맡았던 유니버설도 영화 홍보에 별 의지가 없었다고 한다.
* 꿈이나 상상보다는 뉴스에 더 끌려 - 상상력 풍부한 그의 작품세계 때문에 혼동되지만, 스필버그는 영화 소재를 고를 때 주로 실제 일어난 사건들에 매력을 느낀다고 말한다. 꿈이나 상상보다 뉴스에 난 이야기에 훨씬 더 끌린다는 것이다. 가장 만들고 싶은 영화도 코스타 가브라스의 <제트>같은 정치 스릴러라고 한다. 그는 흥미를 끌 만한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 그리고 영화제작의 시작부터 마무리할 때까지 그 흥미를 유지해 줄 수 있는 이야기를 찾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신나는 때도 이야기를 구상할 때라고 한다. 그가 만든 영화의 대부분은 여행과 관련되어 있다. 목적지는 항상 1막에서 알 수 있다고 한다. 대신 그가 영화 소재로 거부한 것은 ‘침략’이다. 조국에 대한 침입, 완전한 점령 이야기다.
* 스필버그 영화의 최우선은 휴머니즘 - 스필버그 영화들을 특징 짓는 것으로 ‘너그러움’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는 천성적으로 자신의 관객들이 기대하는 바를 아는 듯 보였고, 항상 그 이상의 위험과 스릴, 정(휴머니즘)을 내놓았다. 스필버그는 이 가운데 자신에게 있어 최우선은 ‘인간성’이라고 강조했다. “인간성이 없다면 아무도 내 영화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기술적으로 영화가 월등하다고 해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 스필버그의 강점 - 각본을 시각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다. 그는 각각의 쇼트를 어떻게 찍어야 하는 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에게는 그 모든 게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촬영 현장에서 그는 쉽게 안달을 낸다. 일단 보이면, 그것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스태프들에게 전달했다고 생각하는 바가 생산되지 못할 때 짜증을 낸다고 한다.
* 스필버그는 ‘과학적 추측’의 추종자 - 그는 “믿으면 과학적 사실이고, 믿지 않으면 공상 과학”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두 신념의 중간에 위치한 ‘불가지론자’라 ‘과학적 추측’을 믿는 입장이라고 말한다. UFO(미확인 비행물체)도 광년 10년의 먼 거리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미국 교외 중심부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미국 정부가 지난 30년간 기밀을 엄수하고 그저 매우 비밀스런 입장을 취했을 뿐,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는 공상과학과 과학적 추측의 구별법에 대한 질문에 “과학적 추측은 초자연을 다루는 것”이라며 그 요소들은 우리의 매일, 깨어있는 일상 속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반면 공상과학은 “당연히 무한할 뿐이며,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한계까지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 원작소설에 끌려 만든 <조스> - 스필버그는 <조스> 프로젝트에서 진정으로 끌린 것은 원작 소설에 있었다고 회고한다. 서로 적대적이던 세 인물이 마지막에 거대한 백상어와 싸우려 힘을 합치는 장면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를 만들고 나서 그는 실망감을 토로했다. 자신이 본 영화 중 가장 단순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저 본질적인 움직임, 서스펜스와 공포가 작동하는 지점들, 그리고 딱 적당한 캐릭터 전개였다며 더 섬세하게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죠스 2>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 외에는 없다고 말했다. 나중에 다른 감독이 세 편의 우스꽝스러운 후속편으로 망가뜨려 놓는 바람에 심기가 불편했는데, 스필버그가 만들었다는 오해까지 받아 더욱 낙담했었다고 한다.
* 리허설을 하지 않은 <이티> - 스필버그에게 있어 <이티>는 “내 마음 속에 전적으로 소중하게 간직한 영화”라고 말할 정도로 애착이 가는 작품이다. 그래서 <죠스>처럼 전편보다 우월하지 못한 후속편으로 기억에 흠집을 낼 어떤 짓도 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거의 완벽한 영화라 생각되는 그것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티>를 만들면서 가장 즐거운 체험을 하고 최상의 결과를 도출했다고 말한다. 영화로 진정한 기쁨을 느꼈고, 시간을 되돌려 뭔가 수정하고 싶지 않은 상황에 가장 근접했던 영화라고 회고한다. 심지어 그는 <이티>를 찍을 때 리허설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과 리허설을 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자연스러움을 죽이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서사극 <라이언 일병 구하기> - 지난 반 세기 동안 2차 세계대전은 영화가 가장 선호하는 소재 가운데 하나였다. 스필버그 역시 2차 대전이 지난 100년을 통틀어 가장 의미심장한 사건이라고 생각하던 차에 마침 로버트 로댓이 쓴 원작을 발견하곤 영화화를 결심한다. 다만 기존 대부분의 2차 대전 영화들이 ‘승리와 자유의 가치’를 추구했던 것과 반대로 그는 사실주의적 접근을 시도했다. 전쟁을 미화하지 않고 진실을 전달하길 원했다. 이 영화에 공포와 혼돈을 부여하려 했다. 그는 탄탄한 각본을 믿고 현장 스토리보드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화의 90%를 핸드 헬드로 찍고 모든 전투 장면을 연속으로 촬영하면서 채도까지 낮추는 등 사실감을 극대화했다. 기존 와이드스크린의 비율을 포기하고 가로 세로 1.85:1의 비율을 택했다. 시선을 위아래로 보도록 해 사람이 실제 보는 방식에 훨씬 근접시켰다. 영화를 좌우가 아닌 위 아래로 보게 하겠다는 나름의 철학이었다. 그는 이 영화 전후로 5편을 그렇게 찍었다. 주인공 톰 행크스의 제안으로 사전 제작 기간에는 주연 배우들이 일주일동안 신병훈련소에서 생지옥 훈련까지 받기도 했다.
* 스필버그를 재 탄생시킨 <쉰들러 리스트> - 개인으로서나 영화감독으로서나 스필버그의 이력에서 <쉰들러리스트>는 극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평단도 마침내 그의 상상력을 재평가하고 그가 영감 넘치는 엔터테이너일 뿐 아니라 진지한 예술가라는 결론을 내리게 했다. 이 영화는 1994년 그에게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안겨 주었다. 1999년에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같은 상을 재차 수상한다. 월트 디즈니 스튜디어를 운영했던 제프리 카천버그는 “스티븐은 국보급이다. 그를 올려다보느라 내 목이 다 부러질 지경”이라고 극찬했다. 스필버그에게 홀로코스트는 너무 큰 도전이었다. 주제가 무겁고 위험했다. 그래서 모두에 의해 철저히 분석되고 검토될 것이라며 부담감을 느꼈다. 그래서 더 정확하고 공정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오락 같다는 인상을 줘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스필버그에게 이 영화는 자신이 계승한 유대인으로서의 유산과 흑백영화의 유산에 대한 헌사이며, 역사상 가장 성공한 영화감독으로 자신을 만들어준 ‘상업적 재능’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려는 투쟁이었다. 이 영화는 타임 워너 회장이었던 스티브 J. 로스에게 헌정되었다. 그는 1992년 사망 때 까지 스필버그에게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다.
* 거대 프로젝트 쉰들러리스트 - 영화 촬영은 폴란드의 크라쿠프 시내, 옛 유대인의 게토 심장부에서 이뤄졌다. 이 영화에는 대사 있는 배역이 126명, 스태프가 210명, 엑스트라가 3만 명에 달했다. 일부러 스타 배우는 피했다. 많은 배우가 계약금도 받지 않고 쉰들러를 연기하겠다고 연락했지만 리엄 니슨을 낙점했다. 가능한 실제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당시 그가 무명도 아니지만 스타가 아니었다. 영화는 흑백으로 만들었다. 최소한 컬러 영화로 찍어야 비디오 테이프라도 팔고 TV 방송국에 방영권을 팔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는 거부했다. 예산도 2200만 달러로 비교적 소규모였다. 폴란드에 남아 있는 유대인 수가 모자라 많은 배우가 이스라엘인이었다. 그들 자신이 홀로코스트 생존자이거나 자손들이었다. 촬영 전에 스필버그팀은 아우슈비츠에 모여 추도식을 가졌다. 아우슈비츠수용소 문 바로 바깥에 작지만 완벽하게 죽음의 수용소를 구현해 세트를 세우는 것을 허가받고 영화 촬영은 시작되었다.
* “무기보다 대화가 더 필요하다” - 스필버그는 <쉰들러 리스트> 이후 <뮌헨>이라는 영화를 찍었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벌어진 이스라엘 육상선수 11명의 납치와 살인을 다룬 이 영화였다. 이스라엘 총리 골다 메이어로부터 “책임자까지 끝까지 색출해 암살하라”는 보복 임무를 부여받은 이스라엘 비밀요원들을 추적했다. 하지만 그는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테러 행위에 는 강력히 대응해야 하지만, 그 원인들에도 주목해야 한다는 스필버그의 철학이 영화에 담겼기 때문이다. 쉰들러 리스트 이후 거의 무한정 그를 찬양했던 많은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맹목적 평화주의자, 심지어 이스라엘의 배신자로 불렸다. 유대인 피가 흐르는 스필버그는 “그는 이스라엘의 친구가 아니다”라는 비판에 가장 큰 상처를 받았다. “살인의 배경을 이해하고 싶어 한다고 해서 살인을 용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항변했다.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며 자신이 믿는 것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이스라엘인들과 사람들 사이에 평화가 도래하는 것이라고 호소했다.
* 속편에 회의적이었던 스필버그 - 스필버그가 <쉰들러 리스트>로 자신의 영화 방향을 튼 이후 사람들은 그가 <쥬라기 공원2-잃어버린 세계>를 연출했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를 제외하면 그는 심지어 <죠스>의 후속편을 만드는데도 반대했던 이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전편을 능가할 것이란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가 <쥬라기공원> 후속편을 내기로 결심한 것은 원작자 마이클 크라이튼에 대한 믿음 덕분이었다. 원작자가 완전히 잃어버린 세계, 완벽한 공룡의 생태계, 인간에 의한 실제 선사시대 땅의 침입 등 전혀 새로운 <쥬라기공원>을 집필한다고 했기에 흔쾌히 그를 믿고 다시 나섰다.
* ‘아버지 링컨’을 보여주려 했던 영화 <링컨> - 스필버그는 유년기에 워싱턴 방문 중 찾았던 링컨기념관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는 영화에서 링컨을 아버지이자 남편으로 보여주고 싶어 했다. 부모의 이혼으로 왕래가 없다가 1990년에야 아버지와 화해했던 스필버그 자신의 아픈 과거가 한 배경이 되었다. 1998년에 만들었던 <라이언 일병 구하기>도 아버지를 생각해서 만든 영화라고 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내 성장기에 그 모든 전쟁 이야기를 들려주어 이 영화를 만드는데 영감을 준 아버지에게 감사 드린다”고 회고했다.
* 영화감독과 제작자, 그 사이 - 스필버그는 자신보다 훨씬 그 일을 잘 할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 기꺼이 일을 위임했다. 분장과 세트 조립, 작곡 같은 분야다.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위임하고는 결코 뒤돌아보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자신이 계속 관여하는 역할로 ‘촬영’을 들었다. 촬영감독이 재량권을 갖는 순간 그가 감독이 되고 감독은 견습생이 되어 버린다고 믿었다. 카메라 세팅도 직접 챙겼다. 그 부분에서 자신의 역할은 ‘영화에 대한 시각적 해석’이라고 여겼다. 자신이 독점하는 또 다른 파트는 ‘편집’이었다. 최근에는 ‘전시’도 포함된다. 영화가 어떻게 배급되고 광고 디자인은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 캠페인과 마케팅은 어떠해야 하는 지를 직접 챙겼다. 그가 진정으로 좋아했던 제작자는 캐슬린 케네디였다. 서로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매우 건강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덕분에 오로지 가능한 최고의 영화 만들기에 전념할 수 있었다고 한다.
* 헐리우드의 과도한 제작비를 염려하다 - <쥬라기공원2>를 만들 때 제작자는 카천버그였다. 그는 디즈니 제작부를 이끌 때부터 제작비용 절감에 헌신적이었다. 스필버그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비대한 예산이 헐리우드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쥬라기공원 후속편을 완성하는 명목으로 그에게 주어진 금액도 1억3000만 달러 였다고 한다. 그는 “지금 헐리우드의 중간 계층은 궁지에 몰리고 있고, 7000만 달러 이상의 영화들 혹은 1000만 달러 미만의 영화들만 허용되고 있다”며 안타까와 했다. 유일한 출구는 이런 거대 예산을 공격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충분히 부유한데다 모두가 아는 배우들이 한 편당 2000만 달러에서 2500만 달러를 받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감독 또한 어마어마한 선행 투자금 수령을 멈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그는 톰 행크스와의 다다음 영화로 구상중이던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그것을 시행하겠다고 공언했다.
* 스필버그를 만든 원동력 ‘간절함’ - 그는 현재 위치에 이르기까지 가장 도움이 됐던 주요인을 묻는 질문에 “세상에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걸 간절히 원했다는 점”이라고 답했다. 그는 영화 감독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젊을 때 빨리 시작하라”고 조언했다. 영화를 만든 다른 사람들에 관해 읽기보다는 ‘자신의 영화’를 만들라고 했다. 상업영화로 성공하길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스튜디오들은 열의와 열정, 배우고자 하는 의지 같은 능력은 믿지 않는다”며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당신이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영화감독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자료”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매번 새로운 주제를 다룰 때마다 시선을 재 창조하려고 노력하라”고 조언했다.
* 스필버그가 말하는 스필버그 - 프로덕션 디자이너 릭 카터는 “스필버그는 마틴 스코세이지가 아니라 프랜시스 코폴라가 아니었다. 그는 진정으로 스스로를 그 수준의 예술가로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스필버그 역시 자신을 그들과 동급으로 여기지 않았다. <컬러 퍼플> 이전에 어떤 이들은 “스필버그는 ‘어른스러운 영화’를 만들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어른스러운 영화는 그것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어른이 됐을 때 만들 것”이라며 몸을 낮췄다. 그리곤 “내가 언젠가 어른스러운 영화를 만든다면 그건 내가 어른이 됐기 때문일 것”이라고 맞받았다.
* 인간 스필버그 - 스필버그의 아버지 아널드 스필버그는 아들을 감수성 깊은 영화감독의 길로 이끌었지만 정작 부자 간의 관계는 평탄치 않았다. 그는 컴퓨터 선구자였는데 일 중독자였다. 게다가 스필버그 표현대로라면 ‘2차 대전의 윤리를 가진 사람’이었다. 어머니 레아는 콘서트 피아노 연주자였다. 부모는 스필버그가 18세 되던 해 갈라섰다. 이후 스필버그는 스스로 많은 사람들을 신뢰할 능력이 없었기에 일정량의 사적인 고독을 즐겼다고 한다. 그는 혼자 있으면서 자신이 생활할 수 있는 창조적인 세계에 가까워지고 싶어 했다. 그것이 바로 영화였다. 스필버그는 타임 워너의 고 스티브 로스 회장과 가깝게 지내면서 구두쇠에서 자선가로 변했다고 한다. 좀처럼 자기 돈을 쓰지 않던 그가 언제부터인지 사적이면서 익명으로 행하는 기부를 하게 되었다. 그는 자선의 80%를 익명으로 한다고 밝힌 바 있다.
* 절친 조지 루카스와 <레이더스> - 평생의 친구 조지 루카스와는 1967년에 처음 만났다. 스필버그는 캘리포니아주립대, 루카스는 서던캘리포니아대학에 재학중이었다. 프란시스 코폴라가 둘을 이어주었다. 스필버그는 당시 루카스가 만든 단편 영화에 넋이 나갔었다고 회고했다. 1~2년 후 다시 만나 친구가 된 둘은 나중에 <레이더스>를 함께 만든다. 루키스는 폭스에서 1등 영화를, 스필버그는 유니버설과 콜롬비아에서 1등 영화를 만들었다. 서로가 스튜디오에 돈을 벌어다 주는 것을 멈추고 이제는 함께 벌어야 할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저작권과 네거티브(필름 원본) 권한은 루카스가 갖고 소유권은 둘이 갖는 조건이었다. 많은 스튜디오들이 거절했지만 파라마운트가 수락했다. 상당한 액수를 벌어들이기까지 6억 달러 이상이 들 프로젝트였다. 둘은 첫 편이 성공하면 두 편을 더 만들기로 약속했었다. 무자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던 스필버그와 성배에 관한 스토리를 원했던 루카스는 결국 둘 다 담기로 한다. 금상첨화로 숀 코네리를 캐스팅해 대박을 치게 된다.
* 관객과 배우 캐스팅 - 스필버그는 초기에 영화를 만들면서 관객이 핵심이라고 것을 가장 먼저 깨달았다고 한다. 자신을 위해 혹은 나를 이해하는 지인들을 위해서 라기 보다는 나를 통해 그리고 관객을 위해 영화를 만들어왔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또 모든 것은 캐스팅에서 결정된다고 강조했다. 캐스팅이 일단락되면 자신의 창조적 노력의 40%가 실현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 초기에는 영화 기여도 가운데 80%를 캐스팅이 차지한다고 했을 정도로 그는 배우 캐스팅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배우가 좋은 아이디어를 내고 그것이 영화를 더 낫게 만든 다면 자신의 자존심 같은 것을 따지진 않겠다고 했다. 개인적으로는 더스틴 호프만과 메릴 스트리프, 로버트 드니로 등을 ‘국보급 배우’로 꼽았다. 자신과 잘 맞는 배우로는 리처드 드레이퍼스를 꼽았다. 그와 일할 때는 고된 작업이 아니라 휴가에 가까웠다고 했다. 클린트 이스티우드와는 절친 사이라고 밝혔다.
* 스필버그가 존경한 영화감독들 - 그는 감독 초창기부터 동 시대의 감독들을 좋아했다. 조지 루카스가 대표적이다. 예전 감독들보다 그에게서 더 많은 것을 얻는다고 말했다. 존 포드에게선 영화에서 필요로 하는 ‘경제’를 배웠다고 말했다. 클로즈업과 와이드 쇼트(장면 전체 촬영)를 제대로 선택하는 법을 배웠다며 그를 ‘기술적으로 가장 완벽한 감독’이라고 극찬했다. 그는 지난 60년간 가장 위대했던 미국 감독 여섯 명의 영화 10편 보는 것보다 이런 동시대 청년들과 영화를 놓고 토론하는 게 훨씬 즐거운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자신에게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 감독으로는 존 프랭컨하이머를 들었다. 특히 그의 편집은 종종 이야기 내용 자체보다 에너지가 넘쳤다고 평가했다. 대학 때 동년배였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그에게 스타였다고 했다. 1960년대 말부터 그가 젊은 감독들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극찬했다. 히치콕에게서는 완벽하게 계획된 살인을 보며 완성도를 배웠다고 했다. 가장 좋아하는 감독으로 윌리엄 와일러를 들었다. 늘 스타일 면에서 완벽하게 스스로를 재창조할 수 있었던 그런 감독들을 그는 존경했다.
조진래 기자 jjr895488@naver.com